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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공부 Learning Korean

한국어 튜터가 되어가는 길

2018년은 저에게,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일.. 아니, 그냥 생각만 해봤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해입니다.

 

2007년부터 2018년 이주하기까지, 저는 '감정평가사'라는 자격증 덕분에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상상하시는 것만큼 돈 많고 여유 있으며 멋진 커리어우먼 또는 워킹맘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직장에서 매일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저는 저의 직장에서 초보 평가사에서 차츰 평가사로서 면모도 갖추어가면서 아침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육아 출근하며 새벽에 일어나 밀린 회사일을 해가며 시간이 지났지만, 맞벌이여도 시부모님께 양육을 부탁드리며 함께 사는 집에, 아이는 차례로 셋이 태어나면서 월급은 통장을 스쳤고, 저는 직업은 번드르르하지만 육아와 업무에 찌들어 출퇴근용 정장도 한 벌 제대로 살 시간 없이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는 이런 쳇바퀴를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었습니다. 남편에게 온 해외 주재원 기회를 덥석 움켜쥐었습니다. 다들 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깝다고들 하셨는데 저는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 떨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한, 그때는 그것만이 우리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인 것 같았습니다. 별다른 대안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낯선 중국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런데, 해외 주재원의 아내에게 딱히 기회는 없었습니다. 해외 주재원으로 외벌이 가장이 된 남편은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나도 한때는 좀 벌었다는 생각에 마냥 집에서 살림하는 주부로 지내는 것은 좀 답답하기도 하고, 남편한테 면이 서지 않기도 하고, 가장 크게는 나 스스로의 자존감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중국어도 처음 배우고, 낯선 곳에 왔지만, 이 적응의 시간을 지나면 나도 여기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한국어교원 2급을 취득하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학점은행제에서 학점도 땄고, 그래서 학위도 얻었습니다. 한국어를 중국인들에게 가르치려면 중국어도 알아야 했기에 중국어도 공부했습니다. 나를 가르쳐 주었던 친절한 문정 씨는 내가 곧잘 배우는 걸 기특해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첫 해외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도 하면서 1년 반 정도 지났을까요, 남편이 인도네시아로 가야한다고 하더군요. 회사가 남편을 필요로 한다 하니, 남편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살짝 두려웠지만 다시 따라나섰습니다. 우리 부부 모두 기러기 아빠나 기러기 엄마를 하면서까지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한국의 문화는 한류를 타고 많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수업에 대한 수요도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미, 한국문화원에서 여러 한국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도네시아에 오래 계시면서 인도네시아어도 잘하는 한국어 선생님 또한 많이 계시더군요. 저 같은 초보, 혹은 이제 한국어 교육에 진입하려는 신입 강사가 나서기에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또 이번엔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2020년, COVID 19 때문에 인도네시아도 비상사태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1년간 온라인 수업을 듣으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남편이 미국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중국도, 인도네시아도 같이 왔는데 그 선진국이라는 미국에 못 갈 이유가 뭐겠습니까. 또 이사했습니다. 

 

처음 미국은 그리 호의적인 이미지가 아니더군요. 자가용 차없이는 마트에 대파 한쪽 사러 가기 어려웠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미국의 많은 관공서들은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회사도 첫 생산공장을 설립하는 일로 남편을 파견한 것이라서 회사의 인사팀 누군가가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미국에서 SSN을 받는 일, 운전면허를 발급받는 일,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일, 아파트를 계약하는 일,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하는 일, 그전에 보건당국에서 요구하는 아이들 건강검진을 받는 일, 배우자 비자로 노동허가를 받는 일까지 모두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아가며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서 불평불만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직접 해결해가면서 어느덧 자신감도 붙고, 영어도 좀 더 늘고,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내 영어를 업그레이드해서 내가 사는 미국 그 교외의 동네에서 부동산 중개사를, 내가 예전에 전문 직업으로 삼았던 일과 유사한 일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의 역마살이 내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더라구요. 그렇게 어느덧 1년 반 정도가 다시 지날 무렵,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이번에 이동은 우리 부부 모두에게 참 뼈아프고, 속상하면서도 인생사에 대해 크게 배우게 해 준 이동이었습니다. 갑작스럽고 반복되는 해외이사에 저는 조금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22년 다시 돌아오려는 우리 가족을 중국은 반갑게 맞이하진 않더군요. 다들 아시다시피,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덕분에 우리는 입국 전에 PCR 검사만 수도 없이 해야 했고, 32인치 케리어부터 20인치 기내용 케리어까지 캐리어 8개를 끌고 아이들 셋을 데리고 혼자 입국해야 했고, 입국하자마자부터 10일의 격리기간 내내 이어지는 코로나 검사에 저는 완전히 질려버렸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먼저 와서 구해놓은 집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안도감이 들면서 그때부터 약 한 달 반을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 지나는 날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웃도 살짝 걱정을 해주더군요.. 

 

그날도 택배를 찾으러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어디 있는지 택배를 못 찾겠더군요.. 짧은 중국어로 옆에 있는 제 또래 여성에게 좀 도와달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바바라는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을 대번에 눈치챘습니다. 저는 모처럼 영어로 얘기가 가능한 한국사람 아닌 중국사람을 만나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어떻게든 친구 삼아야겠다 생각했지요. 벼르다가 집으로 커피를 마시자며 초대했습니다. 흔쾌히 나의 초대에 응해준 바바라와 얘기를 나누던 중, 이 친구가 한국에 꽤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아들에게는 태권도를, 딸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앞서 얘기한 그 한국어교원 얘기와 이사 얘기를 하자 대뜸 저에게 자기 아이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와.. 저는 이렇게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올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시범수업을 할 테니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하지고 제안을 했습니다. 

 

정성껏 시범수업 내용을 꾸렸습니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수업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어렵지 않지만, 꼭 필요한 한국어를 학교에서 만나는 한국친구들이랑 얘기할 수 있는 그런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시범수업에 온 3명의 아이 중, 2명의 아이가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같이 오신 한 아이의 엄마도요!!

 

이제 막 한국어 수업을 시작한 저는 가슴이 벅찹니다. 이렇게 기회가 오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다시 한국어 교원을 공부할 떄 대충하고 넘어갔던 부분도 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한국어를 다른 나라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한국어를 늘 공부하는 한국인이 되어야겠습니다.